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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소매 붉은 끝동 화완옹주 진짜 이야기

by #§☆▒※‡@△◎№*&† 2021. 1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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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이 인기를 얻으면서 화완옹주에 대한 관심도 높습니다. 영조가 사랑한 딸이자 사도세자의 여동생 그리고 정조의 고모, 그녀의 진짜 이야기입니다.

 

화완옹주 

화완옹주(1734년~1808년)

영조 14년(1737년) 1월에 태어난 화완옹주는 조선 제21대 왕 영조와 선희궁 영빈 이 씨의 딸로 이름은 용완입니다. 영조는 열두명의 딸을 두었는데 그녀는 아홉째 딸입니다. 영조와 영빈 이씨 사이의 1남 6녀 중 막내딸이었고요. 하지만 언니 셋이 일찍 죽어 1남 3녀만 남았고 위의 오빠가 사도세자 언니가 화평옹주, 화엽옹주입니다.

화완옹주(출처-드라마'옷소매 붉은 끝동')

처음 영조의 총애는 큰언니인 화평옹주에게 향해있었습니다. 화평옹주는 부모, 형제를 잘 보살피고 성품이 유순했습니다. 하지만 영조 24년(1748) 22세의 나이로 하가하여 살던 사저에서 난산으로 생을 마감합니다. 영조의 충격은 이루말할 수 없었죠. 화엽옹주 역시 혼례후 하가하여 궁을 떠나있었기에 화평옹주에게 향했던 총애는 화완옹주에게로 쏠리기 시작합니다.

 

화완옹주는 영조 25년(1749년) 12세의 나이로 일성위 정치달과 혼례를 올리죠. 원래는 혼례를 하면 궁을 떠나야 하지만 화평옹주때처럼 예외를 적용하여 그녀를 궁에서 한동안 살게 했습니다. 화평옹주는 늘 동생들에게 영조의 편애를 미안해했지만 화완옹주는 영조의 사랑을 독차지하려고 해 남매 사이의 갈등을 유발했습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서 철이 들었죠.

화완옹주(출처-드라마'이산')

하가 한 화완옹주는 오빠인 사도세자와의 관계에 신경을 많이 썼다고 합니다. 영조 32년(1756년) 화완옹주는 첫 딸을 품에 안았지만 안타깝게도 이듬해 1월 세상을 떠나고 말았죠.

 

화완옹주가 큰 슬픔에 혹여 잘못되지 않을까 걱정한 영조는 그녀를 궁으로 데려와 보살핍니다. 그런데 첫아이를 보낸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그녀는 남편까지 잃게 되죠. 같은 날 영조의 왕비인 정성왕후 서 씨가 세상을 떠나지만 그는 빈소를 지키지 않고 사별한 딸을 위로하러 화완옹주의 집으로 달려갑니다. 신하들이 이를 격렬히 반대했지만 소용없었죠. 정말 딸 사랑이 유별나네요.

 

화완옹주 사도세자 그리고 정조 

영조는 남편과 딸을 잃은 화완옹주를 보살피기 위해 그녀를 궁에서 살게 합니다. 당시 영조와 사도세자의 부자 사이는 멀어질 데로 멀어져 있었고 영조는 화완옹주를 편애합니다. 이에 사도세자는 노골적으로 질투심을 드러냈죠.

 

한중록에는 사도세자가 화완옹주에 대해 "저는 자애를 극진히 입고 나는 어이 이러한고" 한탄한 기록이 있습니다. 결국 영조 38년(1762년) 사도세자는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죽고 말죠. 바로 '임오화변'입니다. 그리고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가 후계자가 되죠.

 

오빠인 사도세자가 죽은 뒤 화완옹주는 어린 세손(정조)을 끼고 살았습니다. 입고 신는 것부터 먹는 것까지 전부 챙겼다고 하네요. 정도가 지나쳐 조카인 정조를 자신이 소유하려 들었죠. 그리고 세손의 부인, 화완옹주에겐 조카며느리인 효의왕후를 심하게 구박했다고 합니다. 마치 시어머니 노릇을 한 거죠. 

정조

화완옹주는 조카인 정조에게 집착층을 보였습니다. 아버지인 영조에게서 편집증을 물려받은 것이 아니냐는 말도 있습니다. 이로 인해 혜경궁 홍씨는 더욱 힘들었습니다. 화완옹주에 대한 영조의 총애가 컸기에 누구도 그녀가 지나치다 나설 수가 없었죠.

 

하지만 정조가 사춘기가 되면서 고모의 간섭이 싫었는지 화완옹주를 점점 밀어냈고 둘의 사이도 점차 멀어집니다.

 

화완옹주 양자

화완옹주는 남편인 정치달이 죽자 그의 친척인 정석달의 아들 정후겸을 양자로 들였습니다. 정후겸은 영조와 화완옹주의 후원으로 초고속 승진을 하였고 조정 내에서 또 하나의 세력으로 부상합니다.

정후겸(출처-드라마'이산')

1776년 3월, 세손이었던 정조가 대리청정을 수행한 지 3개월 만에 영조가 83세의 나이로 승하합니다. 정조는 25세의 나이로 임금에 오르죠.

 

조카인 정조가 왕에 오르자 화완옹주의 입지는 좁아집니다. 영조를 등에 엎고 화완옹주의 양자 정후겸은 정조의 반대세력으로 성장했기 때문입니다.

 

정조 즉위 후 정후겸을 귀양 보냈지만 사가로 나간 화완옹주는 처벌하지 않았습니다. 조정 대신들은 끊임없이 그녀의 처형을 요구했습니다. 결국 정조 2년(1778년)  화완옹주의 작호를 삭탈하고 강화도 교동 부에 옹주를 안치합니다. 처형은 피하게 했죠. 그녀는 정조의 배려로 유배지에서 큰 어려움 없이 지냅니다. 유배지를 이탈해 돌아다닌 것도 정조가 무마해주죠. 

 

정조는 승하하기 1년 전 화완옹주를 특별 사면합니다. 대신들은 펄쩍 뛰었죠. 정조가 승하하고 순조가 즉위하자 대신들은 여전히 화완옹주를 탄핵하였지만 순조는 아버지인 정조의 명이라며 이를 거부합니다.

 

정조와 순조의 비호 속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화완옹주는 순조 8년(1808년) 72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합니다.

 

정조의 이야기는 '옷소매 붉은 끝동'이 처음은 아닙니다. '이산'도 있었죠. '이산'역을 맡은 이서진의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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